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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정공>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행사헌부감찰공휘성구묘표(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司憲府監察公諱聖耈墓表)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行司憲府監察公諱聖耈墓表 肅宗乙未賊臣鐫席寵驕姿伐禁木作舍人莫敢誰何趙公聖耈時官監役掌都鄙諸山獨以法繩不少饒遂爲其黨所螫明年鐫誅死 筵臣表白其事閔相國鼎重素材公 仁敬王后陶谷集作明聖王后喪擧授方中事輒辦陞司畜署別提遷司憲府監察亦有能聲旋自免去陞平市署令臺官論其驟李相國䎘俱言曾以不畏強禦且棄職如弊屣去就不苟宜獎用人謂公因劾益顯盖公早遊鄭畸翁弘溟門得以周旋於諸流其不易素秉剛直自守實有所受云公字國老淳昌人玉川府院君忠獻公元吉後別坐 贈昇旨天祥右尹瑌府使贈參判元弼即曾祖祖禰而參奉邊彦瑄其外祖也以萬曆乙亥生性篤於孝甫踰冠遭喪亂作奉父櫬穿賊陣不懾賊不敢犯至誠之感異類如此公群行悉備而此其大者餘可略也公晚歲謝絶祿仕一意閒放既老而堅悍不衰與賓客談諧縱博窮日夜不厭亦未嘗低頭作熊色強求合能疎財周人窮爲義以壽陞折衝授護軍至八十一卒配南陽洪氏死節臣承旨命亨女有婦德人稱女中君子先卒與公同窆千高陽大哉洞辛坐之原公少豪擧饒幹局慷慨有氣節長老頗期以遠大竟抹殺於世人固惜其抱才不展然年登大耋寬樂令終有三子爾鼎爾呂爾壁仲進士季府使女亦歸官族諸孫牧使泰與泰夏泰成而曾孫彦臣命臣繼鑠文科俱爲承旨其進方未艾詘於前而信於後斯可見天施之不爽矣是爲記 龍仁 李宜顯 撰 右議政陶谷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행사헌부감찰공휘성구묘표(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司憲府監察公諱聖耈墓表) 숙종 을미년(一七一五)에 적신(賊臣) 윤휴(尹鐫)가 왕의 신임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나라에서 금(禁)하는 곳의 나무를 베어 집을 지어도 누구 하나 탓하지 못하였다. 조공 성구(聖耈)가 당시 감역관(監役官)으로 도회와 지방의 모든 산을 맡아 홀로 법대로 처리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아서 그들 무리에게 해독을 당하였다. 이듬해 윤휴가 죽임을 당하자 경연(經筵)의 신하들이 그 일을 임금께 아뢰고 상국(相國) 민정중(閔鼎重)이 평소 공의 재능을 알고는 인경왕후(仁敬王后:도곡집(陶谷集)에는 명성왕후(明聖王后)라 하였다)의 상 때 천거하여 방중사(方中事)를 제수하니, 모두 제대로 잘 처리하여 사축서 별제(司畜署別提)로 승진하였고 다시 사헌부 감찰로 옮기었는데 역시 명성이 있었다. 얼마후 사직을 청하니 평시서 령(平市署令)으로 올려 임명했는데 대간(臺諫)이 너무 승진이 빠르다고 논박하였다. 그러자 상국 이숙(李䎘)이 일찌기 공이 강한 윤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과 또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려 거처에 구차하지 않은 점을 들어 장려해서 쓰기를 청하였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공은 탄핵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현달해진다고 말하였다. 이런 것은 대개 공이 일찌기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의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여러 훌륭한 사람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평소 지키던 바를 지키고 강직하여 자신을 지킨 것은 실로 배운 바가 있었다 하였다. 공의 자는 국로(國老)로 순창인인데 옥천부원군 충헌공 원길의 후손이다. 별좌(別坐) 증승지(贈承旨) 천상(天祥), 우윤(右尹) 연(瑌), 부사 증참판 원필(元弼)은 곧 공의 증조·조·고이며 참봉 변언선(邊彦瑄)은 공의 외조부이다. 만력 을해년에 태어났는데 성품이 효성스러워 二十이 되어 상을 당하였는데 난리 중에도 부친의 상여를 받들고 적진을 뚫고 지나가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매, 적이 감히 해치지 못했으니 그의 지성이 이처럼 지극하였다. 공은 여러 행실이 많지만 이상은 그 대략이다. 공은 늘그막에 벼슬살이를 사절하고 한결같이 한가하게 지내 늙어서도 조금도 기력이 쇠하지 않아 손님들과 한담과 바둑으로 소일하여 밤이 늦어도 지치지 않았다. 또 억지로 고개를 숙여 남에게 무엇을 구하지 않았고 재물을 흩어 어려운 사람을 구해주는 의리가 있었다. 장수한 것으로 절충(折衝)의 품계에 올라 호군(護軍)을 제수받았는데 八十一세에 졸하였다.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절의를 지키다 죽은 승지 명형(命亨)의 딸로 부덕이 있어 사람들이 여중군자(女中君子)라 불렀다. 공보다 먼저 졸하였는데 고양군 대재동(大哉洞) 신좌(辛坐) 언덕에 합폄(合窆)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호방하고 기국이 컸으며 강개한 기상과 절조가 있어 어른들이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마침내 세상에 묻히고 말아 사람들이 그 재주를 다 펴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八十세의 큰 수명을 누리며 즐거워하다 졸하였다. 아들은 이정(爾鼎)·이려(爾呂)·이벽(爾壁)인데 가운데 아들은 진사요, 막내는 부사이며, 딸 역시 벼슬하는 집안으로 출가하였다. 여러 손자는 목사 태흥(泰與)·태하(泰夏)·태성(泰成)이며, 증손 언신(彦臣)과 명신(命臣)이 잇달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모두 승지(承旨)로 있는데 전도가 양양하니 처음에는 미미하다가 뒤게 잘된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겠고 하늘의 갚음이 어김 없음을 알겠다. 이상과 같이 적는다. 용인(龍仁) 이의현(李宜顯)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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